Home 유운성 "영원의 순간들: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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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성 "영원의 순간들: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

일시: 2022년 5월 7일 토요일 상영(19시 10분 ~ 20시 32분) 직후
장소: 서울아트시네마(경향아트힐)
상영작: 요나스 메카스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Reminiscences of a Journey to Lithuania)(1972)

※ 아래 본문은 위에 적힌 일시와 장소에서 진행된 유운성 평론가의 강연을 텍스트로 불완전하게 전사한 것이다. 텍스트 타이핑은 강연자가 한 것이 아니며 강연자의 의도와 무관하다. 그리고 말을 청취하는 것과 텍스트 전사된 말을 읽는 것이 다름을 감안하여 어순을 변경한 부분이 존재한다. 또한 텍스트 작성자가 타이핑 과정에서, 본래 강연자가 선택하여 말한 표현/단어와 다르게 작성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 본문에 삽입되어 나오는 이미지들 중에 이미지 아래 설명에서 숫자를 매기지 않은 것은 작성자 본인의 임의로 추가한 것이고, 나머지 3개의 이미지는 강연자가 PPT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며’를 비롯하여 4개의 의문(‘의문 1.’, …, ‘의문 4.’) 각각 아래에 소제목으로 구분한 것은 강연자의 의도와 무관하며, 편의상 내용 및 키워드에 따라 작성자 본인이 나눈 것이다.


목차

  • 들어가며
  • 의문 1.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람이었다
  • 의문 2. 일기 영화 혹은 일기체 영화를 만들었다
  • 의문 3. 주류 영화에 대항해서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 의문 4. 오늘날 누구나 카메라를 들게 된 시대에 걸맞은 예언적 인물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영화를 예시했다

    들어가며

    아트시네마 여기 옮기고 나서 저도 메카스 영화랑 다른 걸 보러 몇 번 왔었는데 이전에 있던 데랑 약간 이 내부가 달라서 뒤에 앉아서 보니까, 이 위에 올라가 있으면 영락없이 공연 포맷이 돼서 되게 어색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라도 사진이 잘못 찍히면 유운성 퍼포먼스(로 오해받을) 우려가 있어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내려와서 하기로 했습니다. — 몇 차례 와서, 답사는 아니었고, 그냥 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스크린이 있는 단상에 올라가지 않고 관객석 A열 앞에 서는 방식으로) 했고요.

    오늘 강연 준비하면서 조금 고민을 했어요. 왜냐하면, ‘오늘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할까?’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한 건 아니고 — 그런 건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어느 정도는 생각해둔 게 있어서 그렇게 걱정을 많이 안 했습니다. — 문제는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되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런데 최근에, 제가 의도한 건 아닌데, “4월 중순부터 5월 초 사이에는 시간이 괜찮다” — 사실은 아무때나 괜찮은데 — 그렇게 얘기를 드렸더니 다들 이번 주에 뭘 잡아 놓으셔가지고 이렇게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어제도 그렇고1.

    영화나 영화 감독들에 대해서 제가 강연할 때 말로 (무언가를) 묘사를 했을 때 부정확할 수가 있거나 어떤 외국어 단어 같은 이런 것들을, 제가 발음했을 때,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텍스트 간단한 거나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것들을 모아가지고 미리 아주 간단한 ppt를 만들어서 쓰고는 했거든요. 근데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고 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ppt 쓰는 걸 선호하지 않아요, 원래는. 왜냐하면, 예전에 학창 시절에 교육공학 들을 때 배웠던 것 중에 하나가, 프레젠테이션에서 텍스트가 지나치게 많거나 정보가 많고 화려할 경우에 언뜻 보면 정보가 많아서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집중도 안 되고 기억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 요즘 교육공학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랬어요. — 그래서 이제 ppt를 쓴다고 했을 때는 아주 간단한 텍스트나 사진만 쓰는데, 물론 뭔가 투자를 받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된다거나 혹은 애플처럼 격식 있는 발표 같은 그런 때에서야 화려한 PPT를 해야 방송에 나올 테니까, 근데 저는 그럴 게 없으니까 상관이 없으니까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안 하는데요.

    오늘 사실 고민한 게 그거예요. (만약) 몇 개 얘기해볼 때, 이 분 영화는 왠지 스크린에다가 막 뭘 띄워놓고 ‘이렇습니다’, ‘이 장면이 이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그냥 느낌상 되게 결례라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왠지 메카스 영화하고 관련해서는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 그래서 특정 부분을 발췌해서 보면서 ‘여기는 이렇다~ 저기는 이렇다~’ 이렇게 얘기하는 건 더 좀 이상하게 여겨졌고, 그래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 근데 정확히 잘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런 것 때문이겠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천국의 파편들

    사실, 오늘 강연하기 전에 미리 여기에 와서 지난 수요일날 이 영화를 보고 상영 후에 있는 대담2도 들었었습니다. 그때 메카스 감독의 아드님(세바스찬 메카스Sebastian Mekas)하고 율리우스 지즈3 감독하고 또 이제 핍 초도로프4 씨, 그리고 여기 김성욱 디렉터님이 진행을 맡아서 대담을 했었는데, — 그때 대담 자리에서 제가 객석에 앉아서 듣고 있는데 — 요나스 메카스 자신의 표현이기도 한 “천국의 파편들fragments of paradise”이라는 표현과 관련된 이야기가 짧게 오갔었거든요. 그러니까 프래그먼츠 오브 파라다이스(fragments of paradise)라고 하는 — 그래서 사실 이 표현 자체는 메카스 자신이 직접 쓴 표현이고 정확히는 1979년에 발표했던 《천국은 아직 여기에 (세 살을 맞이한 우나)》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번에 상영은 안 되고 있어요. 이 작품에 나오는 사이 자막에 그 말이 나와요 — “이것은 천국의 파편들이다”라고, 그래서 이제 그 뒤로도 본인이 자기 영화 얘기하거나 할 때 꼭 이 영화(천국은 아직 여기에) 한 작품이 아니어도 “천국의 파편들” 혹은 “리틀 프래그먼트 오브 패러다이스”(천국의 작은 조각들/파편들) 이런 표현들을 썼었는데 이게 이제 《천국은 아직 여기에》에서 나왔던 이 표현을 이제 가지고 그때 앞에서 얘기 나누시는 것들을 들으면서 짚고 좀 생각을 해봤어요. 사실 이 표현은 메카스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이 빌려 쓰는 표현이긴 하거든요. 그리고 되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실은 메카스 자신이 자신의 영화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되게 잘 기술한 표현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근데 메카스는 자신의 영화를 두고 천국의 파편들 혹은 천국의 작은 조각들/파편들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또 재미있게도 메카스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이제 종종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 자신은 ‘천국의 파편들’인데, 우리가 실제로 메카스의 영화를 보면서 “파편화된 천국에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어떤 낙원에 있는 기분이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왜 그럴까.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집, 집채, 가족

    그래서 이제 여기서 파라다이스라는 말 대신에 역시 요나스 메카스한테서 천국, 파라다이스, 낙원이라는 말만큼이나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띠는 홈(home), 집이라는 말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파편들이라고 할 때, 메카스한테 있어서 본인이 뭔가를 표현할 때 파라다이스나 홈 이런 것들은 때로 의미상으로 이렇게 무게가 같이 실려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개념은 약간은 교환 가능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제 천국의 파편들을 바꿔서 얘기하면 ‘집의 파편들’이에요. 그런데 천국의 파편들이라고 할 때는 느낌이 안 오던 게 집의 파편들이라고 하면 굉장히 좀 느낌이 달라지는데, 사실 이제 ‘집을 어떻게 정의할 거냐’라고 할 때 간단하게 정리하는 방식 중에 하나는, 집은 ‘집채’하고 ‘가족’을 동시에 가르키는 것이다, 라고 일단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집채라고 하면 하우스(house)이고, 가족이라고 하면 패밀리. 그래서 적어도 우리가 홈이라고 할 때는 가족은 있는데 하우스(집채)가 없다라고 할 때, “나는 집으로 간다”라고 하면 ‘나는 가족 만나러 간다’ 뜻으로 쓰진 않잖아요. 그리고 가족은 없고 살던 집만 있을 때 나는 “아이 고 홈”(I go home) 뭐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되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집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집채하고 가족이라고 하는 게 결합돼 있을 때 보통 그걸 염두에 두고 홈이라는 말을 쓰는데, 메카스 관련해서는 본인 생에 — 오늘 보신 작품을 통해서도 보셨지만 — 이제 이거와 관련해서 실제 삶에서 표착도 좀 있지만, 그런데 이제 메카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번 집이라는 말을 지금 끌어와 본 거니까 저는 실제 메카스의 리투아니아의 어떤 집, 고향을 얘기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꼭 그것만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이 집을 메카스 영화와 비유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뭔가 가족은 막 흩어지기 시작하고 집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태……

    그런데 메카스의 영화 찍기, 필르밍Filming, 영화를 찍는다고 하는 거는, 어디론가 막 이렇게 흩어지고 떠나는 가족들한테 ‘뭔가 기념할 만한 거 하나씩 달라’, 친척들한테도 ‘남은 거 하나 달라’, ‘당신이 갖고 있던 거 하나’, 다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그리고 이렇게 무너져 내린 집터에서 막 굴러다니는 가족 사진도 모으고 자기가 좋아했던 공간의 벽에서 뜯겨져 나온 벽지도 모으고 벽돌 조각도 모으고 파일 같은 것도 모으는 일, 이런 것과 굉장히 비슷한 방식의 영화 만들기라고 생각해요, 비유적으로 보면. 아니, 영화 만들기가 아니라 ‘영화 찍기’ 자체가. 이건 컬렉팅에 가깝다….. 무너져가는 집채에서 그 조각들을 모으고 떠나가는 가족들한테 기념품 하나씩 내어보라고 조르는 게 이 사람의 필르밍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럼 그렇게 촬영한 것, 찍은 것들을 갖고 만들어진 이 사람의 영화는 대체 뭐냐, 라고 생각을 해보면 제가 이 사람 영화를 볼 때 이 분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기분은 이렇습니다.
    일단 집터를 찾아가요. 근데 석양에는 너무 기분이 우울하니까, 보통 찾아가는 게 이제 느낌상으로는 일부러라도 일출의 시간에 가거나 아니면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갑니다. 그리고 이제 한낮에 태양빛 아래 서 있거나 일출일 때 가가지고 해뜰 때 가가지고 자기가 이렇게 모은 것들을 하나씩 확 던지거나 뿌리면서 햇빛에 그게 비춰서 이렇게 반짝일 때마다 ‘아, 행복한 시간이었어’라고 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기분. 그러니까, 뭔가 그 조각들을 확 뿌리면서 그게 반사될 때마다 ‘아, 행복한 시간이었어’ 하면서 과거형으로 말하면서 기어이 또 현재의 행복감을 느끼는 걸로 집을 감촉하려고 하는 시도가, 메카스의 영화를 볼 때의 느낌하고 저는 되게 가깝거든요. 그래서 이게 사실 (메카스에게) 집이라고 하는 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메카스도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데, 이런 조각들을 던지면서 ‘행복했었어’라고 말하는 동안에만 그 순간에만 지극히 현재적으로 떠오르는 집의 감촉을 계속 느끼고 싶은 것. 그럼 이런 사람이 집에 있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계속 던지고 말해야 돼요. 끊임없이 뿌리고 ‘행복했었어’, ‘정말 행복했었지’, ‘아, 이 분하고 있었을 때 좋았었어’. 그러니까 말하자면, 언뜻 볼 때 서로 교환 가능해 보이는 영화들을 왜 이토록이나 평생 동안 이렇게 많이 만들었는가, 라고 생각을 해보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않나…..

    일시적, 반복, 비극

    그러니까 이 사람한테 있어서 그런 천국은 이 조각들을 뿌리면서 움직이는 동안에만 반짝이는 거라 그 행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메카스 영화가 어떤 천국의 감촉이라는 걸 주는 영화인 건 사실인데 항상 일시적이어서 작가 개인으로서는 그 행위를 반복해야 되고 우리 입장에서는 스크린에 그게 펼쳐지는 동안밖에는 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낙원이다. 사실은 굉장히 비극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표현이 잘 돼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전체적으로 메카스 영화를 한번 얘기해 보자고 할 때 떠올려본 비유는 이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시인의 영화를 한 편 보고 후진 비유를 들어봤으니까 이거에 대한 짜증은 잠시 멈춰주시고, 어쨌든 이런 내용이 제가 — 여러분들이 오늘 보신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 같은 영화를 비롯해서 메카스 영화를 볼 때 — 느끼는 기분에 굉장히 가깝다…… 그래서 이 얘기를 왜 오늘 시작하면서 드렸냐면, 이런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영화에서 발췌한 클립을 쓰는 게 이래서 어렵다, 라는 얘기를 한 거예요. 햇빛 아래에서 자기가 손에 든 조각들을 던지고 막 뿌리는 그 과정이 있는 동안에만, 천국을 혹은 집을, 행복감을, 영원의 순간을 오직 순간적으로만 감축되는 영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건데, 제가 거기서 조각 몇 개를 들고 와서 ‘이게 메카스가 천국과 집과 행복과 영원을 감축하기 위해 쓴 조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근데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메카스의 영화라고 하는 게, 그야말로 어떤 체험의 영화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뭔가 비평적으로 말하거나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절대로, 만약에 이제 그런 비평적으로 말하거나 쓸 수 없는 절대적 체험이나 경험은 전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유의 말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고 ‘이 체험은 너무나 말로 형언하기 힘들어서 내가 할 수 없다’ 그건 아마 죽음밖에 없다. 그 이외의 것은, 직접적 체험은 아니어도, 뭔가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할 수 있다, 해야 되고.

    근데 어쨌든 메카스의 영화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서 얘기할 수 있는데, 다만 메카스의 영화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방식은 특정한 부분을 놓고 이분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얘기하는 건 정말 무의미할 것 같거든요. 어떻게 해도. (물론)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메카스 영화의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가 《월든(일기, 노트, 스케치)》(Walden(Diaries, Notes and Sketches))(1969)의 몇 분 몇 초에 나온다’ 이런 걸 확인하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확인하면 뭐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부적으로는 설명이 틀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어쨌든 메카스 영화는 보고 나면 뭔가 말하고 싶다, 쓰고 싶다는 충동을 주는 영화인 건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거에 걸맞게 얘기를 해보자…… 그래서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 빼고 빼고 해서 딱 3개 페이지의 ppt만 만들어왔고요. 그리고 메카스 영화에서 발췌한 클립이나 사진은 일체 안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보실 이 뒤에 화면은 계속 이 상태로 있을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지금 보신 영화를 알아서 프로젝션하시거나 아니면 그동안 보신 영화를 프로젝션하시거나 아니면 내일 보려고 하는 영화를 상상적으로 프로젝션하시면서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강연의 제목이 왜 영원의 순간이냐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어느 정도는 약간 설명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거는 크게 주제가 4개예요. 그래서 이 네 가지 주제를 다 얘기하고 나면 끝이 날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귀가하실 시간을 언제쯤으로 잡아야 될지 가늠을 하셔야 될 테니까, 4가지 주제 중에 3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시간이 비슷하고요, 15분에서 20분. 마지막 주제는 한 5분이면 끝납니다. 얘기할 때마다 지금 몇 분쯤 남았겠구나 생각을 하시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으면 도중에 퇴장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퇴장하는 거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실 게 없어요. 여기 보니까, 앞에 서 있어 보니까 다 보여요. 그런데 오히려 끝까지 남아 있으면 그게 제가 불편하거든요. 왜냐하면, ‘오늘 내가 완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하거나 조금이라도 건질 말이 있을 경우에 사람들이 모두 집중할 리가 없다는 게 제 신조예요. 그래서 이제 그런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4개의 주제: 통념과 의문

    일단 제가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4가지 주제는, 전부 다 요나스 메카스 영화에 대해서 흔히 이야기되는 것들 — 통념들 — 에 대한 의문의 성격을 띕니다. 근데 의문이라고 했지, 반박은 아니에요. ‘꼭 이렇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게 아니라 — 그런 통념들은 어느 정도 메카스 영화가 유발하는 거니까 생각을 해보되 — 그 통념들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는 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네 가지 주제는 뭐냐면,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정리해 봤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고 얘기를 계속 진행할게요.

    • 첫 번째, 메카스는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 두 번째, 메카스는 이른바 일기 영화 혹은 일기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 세 번째, 메카스는 주류 영화에 대항해서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는 것에 대한 의문.
    • 네 번째, 메카스는 오늘날처럼 누구나 카메라를 들게 된 시대에 걸맞은 예언적 인물로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영화를 예시했다는 것에 대한 의문.

    이 네 가지가 오늘 말씀드릴 주제예요.


    의문 1.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제 먼저 이 가운데 지금까지 했던 얘기하고 관련된 것이기도 해서, 첫 번째, 메카스가 과연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메카스를 개인적으로 알지를 못해요.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얘기는 ‘요나스 메카스가 실제 삶에서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종류의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요나스 메카스 관련해서 많은 증언들이 있고 또 이제 메카스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인이 정리했던 것, 그 위에 지금도 또 출판 준비 중인 이런 일기나 저작들이 있어서 그런 걸 토대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걸 가지고 전기적 삶을 재구성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특히 메카스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얘기하면 되게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영화의 성격 자체가 언뜻 보기에 되게 개인의 삶하고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또 워낙 활동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과 관련된 얘기도 많고 증언도 많고 회고도 많아요. 지인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이제 메카스의 영화와 관련해서 일단 우리는 메카스의 100주년을 맞이해서 먼저 끊어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 이거는 영화가 아니고 문학에서라면 — 아마 ‘카프카 수용’ 이런 거와 관련해서 이미 있었던 얘기일텐데 카프카의 지인들을 통해서 형성됐던 카프카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서, 카프카의 어떤 실증적 음울함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식으로 독해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러니까 요나스 메카스의 전기적 상像과 관련해서 그거를 토대로 해서, 메카스의 영화를 해석해버리는 오류 혹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오류. 그러니까 ‘메카스는 일상에서 항상 이런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라는 오류) 그런데 만들고자 했다는 것과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보통 이게, 실제로 영화 감독들이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하는 거랑 만든 영화에는 항상 차이가 있고, 심한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메카스의 경우에도, 어떤 면에서는, 본인이 얘기했던 거하고 본인이 만든 영화 사이에 약간의 균열은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제 본인 스스로도 평론가였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많고, 그리고 영화 자체가 어느 정도 개인적 삶에서 취한 이른바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게 이제 결합돼버려가지고 만들어낸 어떤 이미지가 있고, 메카스의 영화를 보거나 보고 생각할 때의 그 선입견이 덧 씌워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걸 벗어나서 메카스 영화를 보면 좀 다른 게 이제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다행히도 이번에 100주년 행사를 맞아서 요나스 메카스의 아드님이신 세바스찬 메카스 씨가 오셔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미 들려주셨기 때문에, 주제 넘게 제가 메카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급적이면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오늘 이 시간에 필요하다면 그날 그 자리에 참석을 못하셨던 분들도 꽤 계실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 자리에 계셨던 세바스찬 메카스 씨, 핍 초도로프 씨 등의 지인들이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서만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

    이제 저는, 메카스가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 같은 영화를 찍었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이런 영화를 진짜로 스크린에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생각하게 되는 일, 영화가 나한테 보여주는 걸 통해 내가 생각하게 되는 일, 그리고 즉 이 영화가 상상하게 만드는 픽션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네, 그러니까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보고 이걸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고, 저는 특히나 오늘 본 영화는 메카스 영화 중에 가장 픽션적 성격이 강한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알려진 대로 — 일단 약간의 이 영화의 배경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넘어가면 — 이 작품은 미국에서 굉장히 오래 망명을 한 끝에 1971년에 고국인 리투아니아로 돌아갔을 때, 즉, 고향인 세미니스키아Semeniškiai를 방문했을 때 기록한 필름들로 만든 영화예요.

    정확히는 사실 3부로 구성돼 있어서, 1부에는 메카스랑 동생(아돌파스 메카스Adolfas Mekas)이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볼렉스 카메라를 구해서 찍은 푸티지를 비롯해서 망명 시절의 광경이 담겨 있고, 리투아니아 파트는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2부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3부는 메카스가 2차 대전 당시에 동생하고 함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었던 엘름스호른Elmshorn으로 시작해서 비엔나Vienna로 넘어가고 거기서 끝납니다. 이 비엔나 장면에서는 피터 쿠벨카Peter Kubelka나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 아네트 마이크슨Annette Michelson, 켄 제이콥스Ken Jacobs 같은 메카스의 절친들이 등장을 하죠. 이건 (직전 상영으로) 여러분들이 보셨는데, 만약에 ‘이거는 메카스가 고향에 가서 찍은 거야’, ‘저건 메카스의 어머니야’, ‘여기는 고양이야’ 이런 거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2부하고 3부에 어떤 특정 부분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 놓고 이 영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문득 조금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메카스에게 굉장히 거리낌 없고 거리감 없는 친구로서 표현을 표하는 사람들은 다 3부에 나와요. (반면에) 영화 안에서 그 숏들만 보고 있으면 고향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뭔가 딱딱해요. 심지어 우리나라도 — 이렇게 영화 전체로 보면 그렇게 구성이 안 돼 있기 때문에 안 보이는데 찍은 숏들을 보면 —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이 한국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고향 마을 찾아가서 카메라 앞에 부모님들 나란히 세워놓고 찍는 그런 그런 포즈로 찍은 숏도 있고요. 그러니까 친교의 포즈가 아니라, 뭔가 오랜만에 고향의 아들이 왔는데 오랜만에 저 메카스 집안에 애가 왔는데 ‘우리가 한번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하는 그 태도. 심지어 형제들조차도 제가 볼 때는 어딘가 조금 표정이 이상해요. 근데 그게 이제 굉장히 빠른 편집 같은 것들로 흘러가면서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러니까 이런 게 제 인상에 그치는 걸 수는 있어요. 그래서 그건 여러분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신 이후에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런데 어쨌든 이런 쇼트들을 가지고 ‘영화는 그야말로 행복감의 흐름’으로 지내는 분이다.

    근데 한 장면은 아마 여러분들도 동의하시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지금 말한 인물들이 이렇게 비친다면 사람마다 조금씩 느낌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어디냐면 — 이 메카스의 영화에서 장면, 씬이라는 표현을 쓴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 한 장면은 꽤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보고 있으면 그리고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이 영화 볼 때마다 정말 이상해요. 그게 어디냐면, 메카스가 왔다고 해서 열렸다는 고향 주민들의 환영회 장면. 동네 젊은이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이거 좀 과하지 않나? 그리고 생각을 해보면 어디서 많이 본 컨셉이에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아들이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성대한 환영회를 준비한다’ 이거는 어쩐지 스탈린 시기에 농업집단화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전용 극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에요. 마을 축제가요. 근데 이상하게도 환영회는 보이지만, 사람들이 흥청거리면서 먹고 마실 거는 별로 없어요. 그리고 되게 따뜻한 방식으로 얘기가 되고 있긴 한데, 어머니는 집 밖에서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안에서 하면 연기가 가득 차기 때문이다… 이 집은 굴뚝이 없나? 혹은 그 집이 어떻게 돼 있길래. 그러니까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진술하고 어긋나는 것들이 자꾸 화면에 등장해요.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끌고 나가고 싶어 하는 낙원의 구성이 있고, 그 구성에 반하는 것들이 화면 안에 언뜻언뜻 보여요. 최대한 감추려고 해도. 근데 특히 그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버리는 건 이 환영회 장면인데, 그러니까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걸 외화면(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이제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은 프레임 내부에는 뭔가 결핍이 있고 대신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천국과 영혼의 순간이 막 점멸하는 영화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어떤 천국과 영원, 낙원의 풍경은 화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그게 넘어갈 때 뭔가 언뜻언뜻해요. 정작 화면과 화면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딘가 좀 이상해요.

    정작 이 영화에서 정말 낙원인 풍경은 어디에 등장하냐면 3부에 등장해요. 희한할 정도로. 그게 이제 메카스가 이걸 의도했다, 아니다가 아니라, ‘본인이 구성하고 싶은 낙원의 풍경’하고 ‘그 낙원의 풍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용할 수 있었던 재료/파편’ 사이에 모순이 발생해버리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 영화가 그 점에서 그런 걸 잘 드러내주기 때문에 되게 흥미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 영화는 카메라를 든 사람의 앞에 있는 낙원의 광경을 찍어와서 이게 ‘내가 낙원을 봤는데 내가 너희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카메라에 담긴 이 정도야’ 인 영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보이는 것만 봐도. 오히려 카메라 앞에 있는 건, 그게 아니라 그 앞에 주어진 거에서 어떻게든 낙원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천국의 카피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요지는 이렇습니다.
    메카스는 자기가 목격한 행복의 순간들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싶었던 순간을 애써서 재구성하는 것처럼 보여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가 주는 어떤 인상 중에는 분명히 따뜻한 무언가가 있지만 이상한 방식의 비극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작가는 지금 이런 낙원을 구성하고 싶어 하는구나’, 근데 본인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재료들, 질료들이 그거에 저항해버릴 때… 이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수요일 날 와서 대담을 듣는데, 그 자리에서 좀 들은 얘기가 되게 흥미로워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이거는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모스크바 영화제와 유리 주코프

    제가 수요일에 객석에 앉아 들은 대담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어요. 일단,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는 리투아니아가 — 지금 또 우크라이나 관련해서 저 문제가 일어나고 있지만 — 당시에 소비에트 연방에 복속되어 있던 연방 중에 하나였던 시절이고 메카스가 리투아니아에 가게 된 거는,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이 됐는데 이제 소련에 방문을 했지만 당연히 다른 데에 가는 건, 여행이 안 되고 금지, 근데 다행히 메카스한테 호의를 보이고 있다… 정확히는, 러시아의 국영 기관지 프라우다Правда(Pravda)의 당시 편집장 유리 주코프Ю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уков(Yuri Aleksandrovich Zhukov)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어디 갈 때마다 ‘당신은 여기 못 간다’, ‘그래, 그러면 유리 주코프한테 전화 좀 해볼까’, ‘아니 가시죠’ 이랬다고 그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6.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해서 간신히 고향을 갔는데 심지어 고향 갈 때까지도 계속해서 감시자이자 동행인이 붙어 있던 상태라고 해요. 왜냐하면 아직은 적대국이었던 시절 냉전 시기니까. 그래서 영화 속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는 없지만 카메라 옆에는 지금 메카스 감시자가 따라붙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가족을 만났을 때 얘기를, 아버지가 자기한테 해준 적이 있다고 세바스찬 메카스 씨가 하시더라고요. 뭐냐면, 한 20년 넘게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더니 만나서 할 얘기가 없어요. 그래서 다 뭔가 말 없이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거예요. 이렇게,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를 전해주시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걸 듣고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이상한, 저 화면 내부의 결핍 혹은 질료가 작가가 구성하려고 하는 낙원이라고 하는 방향성에 저항하는 것 같은 그 느낌하고 뭔가 맞는다, 이런 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핍 초도로프 씨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단 3일 만에 편집이 끝났다고 그러셨어요. 메카스 영화로는 되게 이례적인데, 《월든》이나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Lost Lost Lost)(1976) 이런 걸 봐도 장기간 동안 찍은 것들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다시 보면서 구성을 해가지고 만드는 형식인데, 이거는 71년에 갔다 와서 곧바로 편집해서 72년에 발표가 됩니다. 만드는 것도 굉장히 빨랐어요. 왜 이렇게 서둘러서 만들어야 했을까, 그건 제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다시 떠나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그곳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더욱 낙원으로 있어야 하니까 낙원이어야 하니까… 이런 심정일 거라고 생각하면 되게 착잡한 기분이 드는데, 그런데 이제 이거는 이 영화 가지고 얘기를 했지만 저는 메카스의 다른 영화들을 가지고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월든》은 제목부터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고 그리고 어느 정도는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책의 제목을 빌려왔는데 그 영화와 소로우의 『월든』(1854) 사이에 관계를 내게 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 중에 하나는 이거라고 생각을 해요.
    소로우의 『월든』은, 그 책을 읽어보면, 소로우가 ‘내가 어떻게 이렇게 숲에 들어가서 이렇게 생활을 했고~’ 이런 얘기. 말하자면, 지상에서 자기가 잠시 동안 구축했던 일종의 낙원에 대한 얘기인데 그 낙원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동안에 소로우가 언뜻언뜻 비치면서 계속 얘기하는 건, 사실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살 수 없는 외부에 대한 얘기가 가득 차 있어요. 혹은 환기시켜요. 근데 메카스의 《월든》은 뭐냐면 이 사람이 가장 바쁜 시절에 어떻게 찍은 영상들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도 되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은 하던 일이 너무 많으셨던 분이어서 영화 감독이라기보다 오히려 당시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기고자이기도 했고, 그리고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Film-Makers’ Cinematheque를 만들어서 운영을 했고 훗날 그게 이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로 넘어가 이전되는데 그것도 해야 되고, 그리고 그런 데를 운영하기 위해서 펀딩도 본인이 직접 받으러 다녀야 되고, 또 내가 발굴한 감독이 있으면 그 필름 들고 유럽도 가야 되고… 그러니까 그런 일들을 하면서 찍은 건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거지만, 우리가 이제 이 시기에 있던 만들어진 미국 실험 영화나 아방가르드 영화의 감독들은 지금 이제는 어느 정도 클래식이 됐어요. 근데 요나스 메카스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그건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데이비드 제임스David E. James 같은 사람들이 얘기하기도 해요.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영화가 좋아서 계속 한 일이지만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는 잠을 못 자고 밥 잘 못 먹고 하면서 그러고 있는 동안에 찍은 것들인데, 사실은 《월든》에는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보이지 않지만 《월든》을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 또 추정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근데 이제 일단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의문 2. 일기 영화 혹은 일기체 영화를 만들었다

    다음은 이제 메카스가 일기 영화 혹은 일기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과 관련해서예요. 이 주제는 곧바로 들어가기보다는 조금 우회해서 다룰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요나스 메카스가 항상 볼렉스Bolex 카메라로 주변의 일상을 촬영해서 담아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는 건 본인이 만든 영화와 남긴 필름의 양을 봐도 그렇고 직원도 한둘이 아니고요. 그런데 이런 메카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떠올리게 되는 건, 왜 그런 걸까, 왜 그랬던 걸까,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마트폰이 되게 일상화된 지금은, 이거에 따라서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어떤 방식…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주체성의 양식까지 달라져서 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긴 한데, 적어도 스마트폰의 등장 이전까지, 즉,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까지를 고려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지금이야 친구들 만나서 이렇게 스마트폰 꺼내서 같이 앉아서 뭘 하고 있는 것도 하나도 안 이상하잖아요. 근데 그런 스마트폰 나오기 이전에 혹시 그때를 사셨던 분들이 있다면 생각을 해보면, 친구들하고 앉아 있을 때 카메라를 들고 이 광경을 계속 찍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그건 뭐냐면 사실은 되게 내성적인 사람일 거예요. 그러니까 대화에 끼는 게 조금 그렇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무례한 사진기자나 혹은 어쨌든 이 상황을 증언해야 돼서 뭔가를 포착해야 되는 현장 사진가가 아니라, 친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드렸어요.
    친구하고 있는데 친구들하고 얘기하면서 계속 이제 얘기하는 동안 ‘응’, ‘으음’ 하면서 있는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을 해보면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고 대화에 쉽게 섞이지 못하거나 친구들 가운데 뭔가 하는 일이 약간 다른 사람.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죠. 감독은 감독인데 여기에 있는 감독들하고 조금 다른 감독. 말하자면 이 친구들이 볼 때 영화도 찍는 사람이지만 얘는 평론가이자 기획자로서 더 비쳤을 수 있는. 물론 이제 그런 거를, 뭐, 제가 심리 분석을 할 수 없으니 그건 잘 모르겠고, 《월든》이나 오늘 보신 영화나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같은 이런 영화들을 만들 무렵에 메카스의 나이가 이미 59세예요. 그러니까 이제 30~40대를 계속해서 그렇게, 어떻게 보면 다른 필름 메이커들이 문화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조력하면서 지냈어요. 물론 데뷔작이나 이런 걸 좀 찍긴 했지만 그 뒤로 아주 짤막한 단편들 말고는 작품 활동을 거의 내놓지를 못했었죠. 근데 메카스의 대표작인 《월든》 같은 영화를 보면 그 카메라 앞에 되게 많은 지인들이 나오는데 그 지인들의 모습을 찍은 방식이 조금씩 달라요. 제가 볼 때 그렇다는 건데, 여러분들이 그냥 볼 때 ‘다 지인이구나’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시 보게 된다면,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나, 라는 걸 보면 사람마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방식이 조금 다르고 메카스가 이 사람을 포착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요.
    하나하나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영화인들 가운데 되게 이 사람이 편안하게 보고 얼굴 가까이에서 이 사람을 포착하고,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이 사람도 메카스를 보면서 굉장히 상호작용이 좋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P. 애덤스 시트니P. Adams Sitney이나 혹은 에이미 토빈Amy Taubin 같은 사람인데 둘 다 영화 평론가예요. 그리고 오늘 보신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에서 3부를 보면 피터 쿠벨카Peter Kubelka의 존재감이 상당히 특권적이죠.

    거리감과 피터 쿠벨카

    저도 이 분을 예전에 2005년에 한국에 초청해서 전작 상영5하고 강연을 꾸려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기억이 되게 좋게 남아 있는 분이에요. 본인이 이렇게 여행 많이 다녀서 마일리지가 쌓였다고 항공권도 직접 끌어서 오셨고, 강연 끝난 다음에 식사 대접하려고 했더니 ‘내가 봐둔 데가 있다’고 해서 가자고 해서 갔더니 김밥천국에서 만두 두 접시 드시고 나서 너무 잘 먹었다고 하셨는데 그 다음 날은 이제 저한테 쪽지를 하나 보여주면서 ‘한국에서는 내가 이걸 반드시 먹어야 된다. 내가 요리 연구가이기 때문에’, 실제로 또 이분이 음식이나 이쪽으로도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쪽지에 어스 드래곤 수프라고 써 있었어요. 그래서 워스 드래곤 수프 누가 저어줬는지 모르겠지만 토룡탕을 직격한 거더라고요 지렁이로 끓인 구 그래서 나는 그걸 들어본 적은 있지만 먹어본 적도 없고 어디서 파는지도 모른다 했는데 본인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서 드시고 가셨어요.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분입니다. 굉장히 재밌는 분이에요. 근데 저 쿠벨카의 존재감이, 이 영화 보고 있는 3부에 — 물론 다 지인들이 있지만 — 이 둘 사이의 교류가 얼마나 컸을지 느껴질 정도인데, 사실은 메카스가 이 사람을 굉장히 편안하게 대한다… 뭐냐면 쿠벨카는 사실 실험 영화의 거장이기도 하지만 오스트리아 필름 뮤지엄Österreichisches Filmmuseum(Austrian Film Museum)의 공동 창립자7이기도 하고 기획자이기도 해서, 사실은 영화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 중에 메카스하고 공유하는 부분이 되게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이제 이 요나스 메카스와 관련해서 이제 메카스가 한 말로 얘기되는 ‘영화는 쇼트와 쇼트가 아닌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도 사실은 그 쿠벨카가 흔히 쿠벨카의 메트릭 필름Metric Films, 즉, 운율적, 계측적으로 프레임 단위로 구성된 영화 작업을 두고 쿠벨카가 강의하면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영화는 프레임 사이에서 발생한다’라는 거예요.8 ‘이거는 쿠벨카가 저작권이니까~’ 이게 아니고, 둘의 교류가 잦아서 둘 중에 누가 (처음) 이걸 꺼낸 말인지 구분을 못하겠어요. 사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은 — 다 지인이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 메카스의 카메라를 보면 이상하게 수줍음이 느껴집니다. 보고 있으면, 약간 수줍어하는. 그러니까 카메라에서 이 사람을 찍은 걸 보면, 자기가 굉장히 편하게 느끼는 사람한테 대하는 거랑, 친구는 친구인데 (전자만큼은 아닌 사람한테) 대하는 것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라는 거예요.

    카메라 마스크

    그래서 사실 이런 측면들, 지금 언급했던 쿠벨카 같은 기획자이자 감독 혹은 에이미 토빈이나 애덤스 시트니 같은 어떤 영화 평론가들처럼 이렇게 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들 말고 다른 어떤 막 이제 그때 당시 부상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필름 메이커들을 찍을 때의 메카스를 보면 수줍어요. 근데 그럴 때 이 사람 카메라는 흔히 말하는 카메라 만년필la caméra-stylo(the camera-pen)9이 아니라 카메라 마스크 같아요. 그래서 일기라고 할 때, 그러니까 주관적 내면성을 상징하는 펜이 아니라 상호적 외면성의 마스크 같다고 이 사람의 카메라는 그러니까 저는 가면이라고 하면 뭔가 좀 음음하게 들리니까 근데 다행히 요즘에는 우리가 다 마스크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상호적 외면성이 뭔지 압니다, 이제. 지금 야외에 나가면 마스크 안 쓰고 다녀도 된다지만 어쩐지 다 눈치 보면서 여전히 쓰고 다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의 마스크. 안 해도 되는데 왠지 조금 이렇게 뻘줌. 그리고 쓰고 있으면 마음이 좀 놓이는. 그리고 그냥 얘기하려면 약간 그런데 마스크 쓰고 얘기하면 조금 편한 그것처럼 그냥 얘기할 때 조금 그런데 카메라를 갖고 가서 이렇게 얘기하면 좀 편한. 그래서 저는 메카스의 카메라는 흔히 에세이 혹은 일기 이런 거와 결부돼서 쓰이는 카메라 만년필이 아니라 카메라 마스크 같아요, 이 사람은. 그런데 얼굴을 가리는 그 마스크의 뜻에서의 그 마스크는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거리감과 스탠 브래키지, 로버트 할러

    《월든》(1969)의 네 번째 릴


    근데 이게 정말 강렬히 느껴지는 게 《월든》 같은 영화인데 특히 스탠 브래키지 집을 방문한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파트의 제목부터가 조금 그래요. 스탠 브래키지 집으로 갈 때 파트의 제목이 비짓 투 브래키지스(A VISIT TO BRAKHAGES)인데, 메카스는 보통 종종 영화에서 자기 친구들을 별다른 성 언급 없이 이름으로 불러요. 근데 여기는 브래키지스라고 분명히 성을 표기를 하고 있는데 브래키지만이 아니라 브래키지 가족을 방문한 거니까 정확하기는 한데, 그렇게 따지면 오늘 보신 영화에도 부부가 나오거든요. 월든에도 나오는, 역시 메카스의 굉장히 절친이고 되게 편안하게 느끼는 켄과 플로. 자막에도 그냥 켄 앤 플로라고 나오고, 지금은 좀 알려지면 그때는 오히려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 영화 보고 캔 앤 플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이 메카스의 지인들 빼곤 켄 제이콥스하고 플로 제이콥스 부분인데 그들을 얘기할 때는 켄 앤 플로인데 스탠 브래키지하고 제인 브래키지는 브래키지스예요. 이거는 뭘까 그러면, 약간 거리가 느껴지죠. 그리고 숲속에 있는 브래키지의 집을 방문해 찍은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이 나중에 《월든》을 확인해보면 폼 하지만 브래키지는 화면 구석에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화면 밖에 있어서 거의 안 보이고 우리가 그 내내 보게 되는 게 브래키지 아내인 제인 브래키지하고 애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왜 그럴까. — 그런데 《월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이 아예 안 나오거나 그냥 성 없이 이름만 나오는 가운데 성과 이름이 같이 나오거나 성만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칼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마리 멘켄Marie Menken 이런 사람들이에요. 근데 드레이어와 리히터는 1889년, 1888년생이고 마리 멘켄은 1909년생이라 메카스하고 연대 차이가 1세대, 2세대 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거리에 따른 존경의 표시일 수 있죠. 근데 브래키지는 1933년생이라 메카스보다 11살 아래예요. 그러면 이거를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될까. 그래서 이제 여기 보면, gith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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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3월, 뉴욕 주립 대학교의 버팔로 캠퍼스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요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 and Jonas Mekas at SUNY Buffalo conference, March 1973)
    사진 촬영: 로버트 할러(Robert Haller)
    이미지 출처: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


    사진인데요. 이거는 이제 오늘 보신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1년 뒤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1973년에 있었던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 컨퍼런스 자리에서 찍은 거고, 왼쪽에 있는 게 스탠 브래키지고 오른쪽에 있는 게 요나스 메카스였어요. 이들이 있는 이 사진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보여줬을 때 ‘어느 쪽이 연장자처럼 보이니?’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 것 같을까요? 브래키지는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옆에서 뭔가 얘기하고 걸 ‘음, 음’ 하는 태도를 듣고 있고, 메카스는 말하는 게 잘못 전달될까 봐 양손을 막 펄럭이면서 부지런히 막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뭐냐면 이런 사진은 이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심리적 감정이 있는 사람만 포착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걸 찍은 사람이 로버트 할러Robert Haller라는 분이에요. 로버트 할러는 요나스 메카스 뒤를 이어서 1980년부터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디렉터를 지냈던 분이고, 사실은 앤솔로지 창립 이래로 요나스 메카스를 제외하고는 제일 오래 거기서 일했던 사람이에요. 근데 이제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리고 요나스 메카스가 로버트 할러의 결혼식을 찍은 로버트 할러스 웨딩Robert Haller’s Wedding이라는 한 3분 정도 되는 영상이 있는데 이거는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 들어가시면 여러분이 무료로 보실 수 있어요.

    《로버트 할러의 결혼식》(ROBERT HALLER'S WEDDING)
    (요나스 메카스, 1980)
    (영상을 업로드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계정에서 외부 재생 제한 설정을 해놓은 관계로, 'Watch on Vimeo'를 눌러 Vimeo 페이지로 이동하여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그거는 메카스가 이 사진을 찍은 로버트 할러한테 일종의 결혼 선물로 이렇게 주려고 만들었던 영상입니다. 즉, 그 사람이 찍은 건데 이제 이 느낌은 뭘까. 근데 저는 이거에 대해 이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이렇게 막 강의 준비하면서 이 부분 메모를 하다 보니까 ‘어, 잠깐만 지금 메카스가 브래키지한테 열등감을 느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는데’… 절대 그 얘기가 아니에요. 저는 거리감이라고 했지, 메카스가 브래키지한테 어떤 ‘이 녀석이 나보다……’ 이럴 만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보면. 그리고 오히려 제가 볼 때, 굳이 전기적인 걸 끌어오면, 《월든》에서 느껴지는 브래키지하고 메카스 사이의 이상한 거리감은 이 둘 때문이 아니라, 그걸 찍을 당시에 브래키지 부부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둘이 같이 안 있으려고 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크고, 어쨌든 브래키지는 이제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지금까지도 아방가르드 영화사에서 가장 걸출한 영화로 꼽히는 독 스타 맨을 만든 사람이고 그렇긴 하지만, 이제 그걸 가지고 메카스가 ‘얘는 이러고 있는데 나는~’ 이런 식의 스타일은 아니라고 짐작이 돼요. 오히려, 그런 영화를 ‘이런 게 나왔는데, 사람들이 이걸 봐야 된다’, 근데 ‘가급적 많이 봐야 된다’, 가급적 많이 이 정도가 아니라 ‘다 봐야 된다’ 약간 이런 스타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보니까. 이거는 그런 걸 얘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둘의 어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어도 ‘아, 저 사람은 확실히 그냥 영화만 만드는 사람이고 이분은 영화도 만들어야 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구나’ 이걸 아는 사람이 찍은 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근데 《월든》은 어쨌든 브래키지와의 거리라고 하는 게 분명히 느껴지는 건데 그 거리가 어떤 식의 거리냐면 독 스타 맨은 제가 아는 한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가장 서브젝티브한(주관적인) 영화 중에 하나예요. 그 주관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거의 몽환에 이를 정도. 근데 주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몽환적 영역으로까지 솟아버리는, 그런 영화로부터의 물러남을 브래키지로의 집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으로 평형하고 있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근사한 영화지만, 나는 그런 식의 주관성은 아닌 것 같아’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이제 메카스의 소위 일기 영화라고 하는 것들을 보면 일기체 특유의 주관성이 없어요. 실제로. 우리가 일기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렇게 자꾸 보게 되는데, 이 사람 영화는 일기체 특유의 주관성이 없어요.

    일기영화, 일기체 영화?

    메카스는 일기를 쓰듯 매일 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했다는 말을 흔히들 하는데 그것 때문에 일기 영화라고 부르는 거라면 — 본인 스스로도 일기 영화라는 말을 했지만 — ‘일기를 쓰듯 매일 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했다. 그래서 일기 영화다’ 이 정도는 너무 느슨하고 허술한 아날로지(analogy)에 기대고 있는 거다… 일단 몇 개의 차이만 짚어보면, 카메라라고 하는 거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순간적으로 기록하는 거지만, 일기는 어쨌든 회고예요. 두 번째. 일기라는 건 쓰면서 자기 마음의 상태도 확인하고 자아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내 자아는 이런 거야’라는 걸 만들면서 자기 기록을 하는 건데, 카메라라고 찍은 거는 — 특히 이 시기에는 — 일단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기에는 현상이 이루어져서 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므로 시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로 필르밍하면서 자아 구성을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카메라로 쓰기의 경험과, 쓴 것을 보기라고 하는 경험이 시간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정리하면, 일기는 쓰면서 자기가 자기 상, 자기 이미지, 자아상을 만들어가는 기술記述인데, 카메라는 내가 그걸로 무언가 누구를 보는 동안에는 내가 보이지 않고, 내가 보이는 동안에는 나를 어떻게 보이게 구성할 수가 없어요. 그걸 구성할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카메라를 딴 사람한테 줘야 돼요. 그럼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보는 시선으로 나를 쫓아갈 수 있어요. 근데 내가 내 카메라를 들고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특히 이 사람이 썼던 볼렉스를 비롯해서 옛날 카메라는 뷰파인더는 돌리면 안 보이니까. 자기를 찍으려면 자기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찍어야 돼요. 물론 이 말은 요즘에는 적용이 안 됩니다. 지금은 자기 걸 찍으면서 ‘좀 안 좋은데’, ‘오른쪽이 찌그러졌는데’ 내가 구성하니까. 어쨌든 이게 안 되는 시기에 찍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이제 그 그런데 메카스는 비디오 카메라로 나중에 매체 전환을 하긴 하는데 요나스 메카스의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영화들을 볼 때도 참 신기한 건 아마 이런 시기의 경험이 들어가서 습득한 거가 아닐까 생각은 드는데 이른바 비디오 다이어리들도 보통 다른 사람들이 만든 비디오 다이어로디라고 차별화가 되는데 그게 뭐냐면, 비디오로 매체 전환한 이후에도 자아상을 구성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촬영하고 있어요. 이 사람 영화는. 제가 무례하지 않으려고 자꾸 이렇게 돌려서 얘기하는데, 무슨 말이냐면 메카스는 자기 영화에서 별로 멋지지 않아요. 보면. 이건(로버트 할러의 사진) 제가 볼 때 최대한 멋지게 찍은 것 같고요. 다른 분이 찍었으니까. 그리고 메카스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것도 들어가 있고. 메카스가 자기가 찍은 걸 보면 특히 젊었을 때 막 카메라 돌려서 그냥 나온 거 보면 이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라 회계원 같아요. — 이런 말을 하면 너무 무례할 것 같아서 자꾸 돌려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아상. ‘나는 예술가니까’ 하면서 이렇게 찍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시적 자서전

    그러니까 어쨌든 이런 것도 일기라고 부르기에 좀 애매한 부분이 있고, 그래서 대신 화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근사하게 담아냅니다. 그러니까 일기라고 하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자기 구성의 쓰기의 기술인데, 메카스의 카메라는 그런 점에서 되게 주관적이지 않다… 그리고 굉장히 잘 알려져 있지만, 메카스가 촬영할 때 보면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휘두르거나 그냥 대고 찍거나 이런 것도 많고, 심지어 다른 사람한테 그냥 카메라를 막 줘서 찍기도 하죠. 《월든》 같은 경우도 보면 어린애한테도 주고. 그래서 브래키지의 아이가 카메라를 들고 막 찍고 있고 그러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보면 그럼 일기라고 한다면 이런 필르밍은 일기로 치면, 서너 줄 자기가 오늘 하루 일 쓰다가 잠시 친구한테 ‘여기서부터는 네가 생각하는 오늘 나를 쓸래?’ 하고, ‘너도 좀 쓸래?’, “너도 좀 쓸래?’ 이렇게 쓰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런 일기는 없어요. 우리가 보통 말하는 다이어리나 저널이라고 하는 건 이렇게 쓰여지지 않아요. 근데 메카스는 다른 사람을 많이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영화 안에 자기가 많이 나와요. 그 말은 뭐냐면 메카스의 카메라는 수시로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는 얘기예요. 그럼 이런 일기가 있는가… 이렇게 자기 구성적이지 않은 일기가 있는가. 그러니까 ‘너도 좀 쓸래?’, ‘너도 좀 쓸래? 나머지는 내가 쓸게’, ‘이번에는 또 네가’ 이런 식으로 쓰는 일기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왜 오늘 이런 얘기를 하냐면, 일상을 기록했다고 해서 일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기록했다고 해서 일기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거를 가리키는 표현은… 따로 있어요. 다이어리나 저널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리고 매일매일 일상을 기록하는데 내가 좀 쓰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이 사람이 쓰고 이래도 되는 것들은 따로 있어요. 근데 그걸 일기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는 보통 로그북Logbook, 데일리 레코드Daily Record라고 부르고 이제 우리 말로는 일록日錄 혹은 일지日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불러야 되는데, 물론 제가 메카스의 영화는 앞으로 ‘영화 로그북, 영화 일록. 이렇게 불러야 된다’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뭐냐면 일록이나 일지가 아닌 일기가 로그북이나 데일리 레코드가 아닌 다이어리나 전원이 되려면 주관성이 필요한데, 메카스는 그런 주관성에 자기 카메라를 내어주질 않아요. 적어도 메카스가 촬영하는 방식 자체는 일기적이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메카스의 영화를 로그북 데일리 레코드 일록 일지라고 부르려면, 멋도 없지만 사실은 옳지도 않습니다. 너무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너무 느낌이 달라서 그렇게 부를 수 없는데, 다만 메카스는 카메라라고 하는 건, 아주 기계적으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혹은 남이 찍어준 걸 가지고 이렇게 기록해버린, 현재의 푸티지들을 나중에 모아서 보면서 그걸 과거 시제로 회고하면서 내레이션이나 텍스트를 더하는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보신 바의 메카스 영화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양식을 보통 일기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그걸 메카스 스스로가 다이어리라고 불렀다고 해서 혹은 사람들이 흔히 그걸 다이어리 필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정착됐으니까 부르지 말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메카스의 다이어리 영화는 다이어리적이지 않다는 얘기는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네, 그러니까 저는 오히려 이런 방식… 카메라가 기계적으로 기록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록해 준 푸티지들을 모아서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걸 과거 시제로 회고하면서 내레이션이나 텍스트를 더하는 거… 그러면 차라리 이거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메카스 전체 영화 경력을 모아서, 필모그래피 전체를 묶어서, 차라리 ‘시적 자서전’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훨씬 나을 수 있다.

    시인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물론 시인이라고 하는 거를 어떤 뜻으로 쓰고 있냐면 — 지금 시적이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쓰는 거를 좀 피하려고 하니까 — 자기가 주관적으로 만들지 않은 언어들 혹은 공동체가 사용하는 굉장히 범용한 언어들로 주관성의 효과를 내는 사람을, 저는 시인이라고 봅니다. 일단 그러니까 자기가 뭔가 임의로 만들어낸 가령 예를 들어 운성체, 운성 스타일이라고 해서 안 쓰는 표현을 만들 수 있어요. 혹은 저만 쓰면 되게 독특한 레토릭을 만들어내거나… 저는 이런 게 시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은 오히려 되게 훨씬 사물적인 거에 가까운 중립적 혹은 일상적, 심지어 사전적 언어들로 특이한 구성을 통해서 독특한 시들을 만들어내는 시인들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메카스가 시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한국의 경우는 — 저는 이제 지인분들이 알려줘서 좀 뒤늦게 알게 됐는데 — 한국에서는 저는 박상순 시인 같은 경우를 그렇게 봤어요. 근데 박상순 시인 같은 이런 분의 작품을 보면, 흔히 시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그런 방식의 의미에서의 시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박상순 시인의 시하고 메카스의 영화는 닮은 데는 표면적으로 전혀 없어요. 근데 어쨌든 메카스는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자기 고유의 주관적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언어 자체는 상호적, 공동적, 비개인적 언어인데 이상하게 그거의 결합은 주관성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 메카스 자신도 그렇고 메카스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들도 흔히 메카스 영화를 하이쿠俳句(Haiku)하고 비교해서 얘기할 때가 있어요. 근데 그거를 하이쿠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이런 신혼의 입각에서예요. 한국에도 번역돼 있는 마츠오 바쇼松尾まつお 芭蕉ばしょう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おくほそみち의 맨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시 유쿠 하루야はる, 그러니까 ‘가는 봄이요(はる) 새는 울고(とり) 물고기 눈에는 눈물(うをなみだ)’로 끝인데, ‘가는 봄이요 새는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 여기 어디에 표현 자체가 독특하거나 그런 게 없어요. 그리고 여기 어디에도 ‘나’라는 1인 칭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거 자체는 되게 주관성의 효과를 느끼게 해요. 근데 어떤 유운성이라는, 약간 이류 시인이 이렇게 쓸 수는 있어요. ‘가는 봄바람처럼 애타는 마음 해는 매달프게 울고 물고기의 눈물은 어느덧 나의 돌을 타고 흐르네’ 이렇게 하면 이제 굉장히 서브젝티브한 시가 되지만, 후진 주관성의 시가 되죠. 근데 왜 굳이 이런 후진 주관성의 시를 하나 만들어서 보여드렸냐면, 이제 메카스의 영화가 아니라 다른 걸 예시로 하겠다고 하는 덕분에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메카스의 영화를 보면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머티리얼(material)들이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그 자체, 그러니까 주관적 표현을 구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이지 않은 언어들의 결합을 통해서 강한 주관성의 효과를 느끼게만 한다… 물론 그때 내레이션이라든지 어떤 텍스트 같은 것들이 이와 관련해서 효과를 발휘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일단 메카스가 찍은 이 푸티지들의 낱낱을 보고 있으면 이게 서브젝티브하다고 보는 건 굉장히 어폐가 있다… 제 생각이고. 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계속하면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의문 3. 주류 영화에 대항해서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요나스 메카스는 흔히 이제 주류 영화에 대한 대안적 영화를 옹호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일단 평론가로서의 메카스는 영화를 그렇게 종縱적으로, 범주적으로 본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개별 영화가 중요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는 메카스는 진짜 평론가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저는 메카스를 이 사람의 영화보다 글을 통해서 먼저 접했어요, 이 사람의 활동에 대한. 제가 미국에서 이 사람을 봤다는 게 아니라, 이런 활동을 했다는 거를 글로 읽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저한테 메카스는, 아직도 그런데, 영화 감독 이전에 영화 평론가로 강하게 남아 있어요.

    무비저널

    그게 이제 이 책 때문인데 이게 이제 1972년에 출간된 『무비 저널』(Movie Journal)이고 이게 이제 처음 나왔던 초판인데 대단히 희귀본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니까 여러분들도 아마존에서 16달러면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거를, 20년 년 전인가 사서 읽어보는데 일단 그때 당시에 제가 볼 수 없는 영화나 안 본 영화가 너무 많았고, 그래서 이제 봐가면서 이제 하나씩 읽기도 하고 찾아보고 하면서 이제 읽게 됐는데 굉장히 특이했어요. 매력적인. 그리고 그렇게 긴 글들이 있는 게 아닌데, 근데 이 책도 제목이 또 일기네요. 무비 저널이니까. 그리고 부제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등장 1959년부터 1971년까지”(The Rise of the New American Cinema, 1959-1971)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책 뒷면 같은 경우에 요나스 메카스의 소개를 보면,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디렉터 — 이때는 이제 메카스가 디렉터였던 시절이니까요. —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메카스가 평론가로 한참 활동하던 당시,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에 이제 기고했던 동명의 칼럼에 실었던 글들을 모은 거예요.

    여기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부르는 미국 실험 영화들은, 사실은 메카스의 비평적인 기획자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했을 거라는 거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메카스가 중추적 역할을 했던, (그가) 창간한 잡지 필름 컬처Film Culutre, 필름 메이커스 협동조합The Film-Makers’ Cooperative,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사실은 주요 어떤 문화적 작가들로 구상을 한 거잖아요. 근데 저는 이 사람의 글들로 이제 메카스를 처음 접했다고 했는데 이 무비저널 맨 처음에 있는 것부터가 짧은데 재밌습니다. 그래서 한번 앞에 있는 걸 보면 1959년 2월 4일 날 쓴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글이에요.

    2.

       February 4, 1959
    CALL FOR A DERANGEMENT OF CINEMATIC SENSES

    Every breaking away from the conventional, dead, official cinema is a healthy sign. We need less perfect but more free films. If only our younger film-makers—I have no hopes for the old generation —would really break loose, completely loose, out of themselves, wildly, anarchically! There is no other way to break the frozen cinematic conventions than through a complete derangement of the official cinematic senses.


    그래서 제목을 보면 영화적 감각의 교란을 요구함(CALL FOR A DERANGEMENT OF CINEMATIC SENSE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첫 문장이 ‘관습적인, 죽은, 공식적인 영화로부터의 탈주는 언제나 유익한 건강한 신호다’(Every breaking away from the conventional, dead, official cinema is a healthy sign.) 근데 이게 저는 이다음에 쓴 말들이 재밌다고 생각을 해요. 이 첫 문장을 흔히 오해하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요. 아니, 메카스가 했던 말을 가지고 오해한다는 게 아니라, 흔히 하는 말이에요. ‘나는 관습적인, 죽은, 공식적인 영화로부터 탈피할 거야’ 근데 메카스가 그다음에 이 글을 보여드린 건 바로 앞서 제가 한 두 번째 주제 때문인데 그 말이 바로 이 책 첫 머리에 나오죠. We  니드need 레스less 퍼펙트perfect 벗but 모어more 프리free 필름film. ‘우리는 덜 완전하고 좀 더 자유로운 영화를 원한다.’ 그런데 젊은 영화 감독들만이 할 수 있는 거(If only our younger film-makers), 낡은 세대에는 기대를 안 하니까(—I have no hopes for the old generation—), 그게 뭐냐면 리얼리really 브레이크break 루즈loose, 컴플리틀리completely 루즈loose, 아웃out 오브of 뎀셀브즈themselves, 와일들리wildly, 아나키컬리anarchically. 거칠고, 무정부적으로, 자기 스스로부터 벗어난(would really break loose, completely loose, out of themselves, wildly, anarchically!). 그러니까 이 사람이 생각하는 거, 그러니까 관습적인, 죽은, 공식적인 영화의 개념이 뭐냐. 퍼펙트한 걸 추구하고, 자아… 뎀셀브즈,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영화가 이 글의 문맥에서 볼 때는 이 사람이 생각하는 컨벤셔널, 데드, 오피셜 시네마(conventional, dead, official cinema)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두고, 공식적인 영화적 감각… 이런 것들로부터 그걸 완전히 교란시킬 것을 요구하는 짧은 선언 같은 글인데 재미 있죠. 그러니까 뭐냐면 이미 이 글 자체에서, 공식적 영화적 감각이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영화. 그런데 이런 공식적 영화가 꼭 할리우드 영화만 의미하는 것인가… 아방가르드의 혹은 독립 영화의 공식성, 자기적인 것의 완벽성에 집착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실제로 메카스가 이후에 비평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했던 걸 보면 분명히 그런 아방가르드에 대한 거리두기가 같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메카스가 주류 영화에 대한 대안 영화를 옹호했다고 거칠게 말해버리면 이런 측면이 잘 안 드러납니다.

    그래서 가령 월든에서 메카스는 — 자기의 지인이자 친구였던 — 굉장히 유명한 사진작가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찍은 예수의 죄라고 하는 단편 영화에 출연을 했거든요. 그 영화 촬영 장면이 월드에 나와요. 그리고 뒤 페이지 조금 넘기면 바로, 《예수의 죄》(The Sin of Jesus)(1961)에 대해서 이 영화를 ‘이미 이건 클래식이다’ 하면서 되게 극찬하는 그게 나옵니다. ‘뭐야, 자기가 출연해놓고 그럴 수 있어?’ 할 수 있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메카스가 그런 성격의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진짜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로버트 프랭크의 《예수의 죄》 같은 영화를 옹호하고, 로버트 프랭크가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하고 만든 《풀마이데이지》(Pull My Daisy)(1959) 같은 영화도 옹호하는데, 프랭크의 이후 영화들에 되게 거리를 둡니다. 특히, 《월든》을 발표할 무렵에 프랭크가 장편 《나와 내 동생》(Me and My Brother)(1969)을 만드는데, 이 영화 나올 때 이제 《월든》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평도 이 무비 저널에 실려 있어요. 아이I 헤이트hate. ‘정말 싫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이런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이런 놈이라는 게 뭐냐라면 그게 이 사람의 평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 같아요. 각각의 푸티지는 다 내가 좋아할 법한 것들인데 구성이 이상하다… 보면 ‘왜 그랬을까’는 추정만 할 뿐인데 또 그 말도 있어요. 하지만 다시 물어봐요. 그러니까 이게 왜 그랬을까 생각은 이제 해볼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나와 내 동생도 어느 정도 여행기 굳이 말하자면 다이어리라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런데 이제 트래블로그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고 촬영이나 이런 것도 메카스가 염두에 두고 쓸 만한 방식이 있는데 구성 방식은 주관성에 대한 탐구거든요, 영화 자체가. 근데 물론 저는 이 《나와 내 동생》에 대한 견해는 메카스하고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제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제가 재작년에 『보스토크』라는 잡지에 ‘사진적 인물과 영화적 인물’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서 로버트 프랭크 영화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찾아보셔도 좋고요.10

    다음으로 하나만 더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비교를 해봐야 되니까. 필립 로페이트Phillip Lopate가 편집한 『아메리칸 무비 크리틱스』(American Movie Critics)라고 하는, 미국에서 나왔던 20세기에 영화 비평 걸작선을 모은 선집이 있어요. 거기에도 실려 있는 요나스 메카스의 평이고, 저도 굉장히 좋아해서 얼마 전에 비평 관련된 수업을 하면서 예시로 들기도 했던 거예요. 그리고 처음에 이 책을 사서 읽을 때, 아무래도 제가 본 영화들을 먼저 이렇게 찾아 읽다 보니까 되게 일찍 읽게 된 글이기도 한데 당시에 이제 저 브레송의 《부드러운 여인》 같은 경우는 90년대 후반에 뉴요커 필름스에서 나온 비디오가 있어서 좀 일찍 구해 볼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걸 읽는데, ‘영화평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되게 계시적인 글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두 번째 의문인 일기체 영화 관련해서 말씀드린, 메카스적 시적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요. 뭐냐하면, 대단히 단순한 단어들이 이렇게 조합되니까 정말 시적인 힘을 내는구나… 뭐냐면, 브레송 글을 잠깐 한번 따라가면서 읽어보면 되는데, 이제 이 글은 로버트 프랭크의 《나와 내 동생》을 싫어한다고 하고 나서 8개월 후에 발표한 글이에요. 로베르 브레송 이 작품은 2018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죠. 이제 한번 이 글을 따라가면서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 보겠습니다. 영어 자체가 워낙 쉽기 때문에 별다른 그게 없어서 많이 해석은 안 해드려도 될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단어들을 운용하는 방식을 보세요.

    3.

    October 2, 1969

    ON BRESSON AND UNE FEMME DOUCE

    Here is what I thought, walking home from Une Femme Douce. Une Femme Douce is a film about diagonals. Diagonal angles, diagonal glances. About eyes that never really meet. A film without a single frontal shot. A film about three-quarter spaces. About the sound of closing doors. About the sound of footsteps. About the sound of things. About the sound of water. About shy glances. About unfinished glances. About the sound of glass. About death in our midst. About light falling on faces. About lights in the dark, falling on faces. About blood on forehead. About unfinished playing records. About a white crepe blouse. About blue. About flowers picked and never taken home. About the roaring of cars. About the roaring of animals. About the roaring of motorcycles. About green. About how life and death intercut with each other. About hands giving and taking. About hands. About bourgeois pride. About pride. About lights on the door. About lights behind the door. About doors opening and closing. About bourgeois jealousy. About jealousy. About lamps turned out. About brown and yellow. About yellow. About indirect glances. About glances. About one peaceful glance (in the gallery, Schaeffer?). About unfinished records. About doors opening and closing. About doors opening very gently. About a half-opened door. About people standing behind glass doors and looking in. About fool’s hopes. About hopes. About a window which doesn’t lead into life. About a red car seat. About a red shop window. About standing behind the door, looking in. About a green bed and green curtains. About one happy smile in the mirror, at oneself. About eyes which do not look even when asked. About the sound of metal. About sleep. About two diagonal lives.

    ‘여기, 내가 부드러운 여인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던 것. 부드러운 여인은 대각선에 관한 영화다.’ 다이아고날diagonal. 그런데 이 다이아고날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냐면, 다이아고날 앵글(angle).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면 정면 쇼트보다는 약간 이렇게 비스듬히 찍은 숏이 많으니까. 그리고 다이아고날 글랜시스glances. ‘대각의 시선’은 뭐지? 그 다음에 이제 얘기가 나올 거예요. 어바웃about 아이스eyes 댓that 네버never 리얼리really 미트meet. ‘결코 진정으로 만나는 법이 없는 눈들에 대한 영화’ 그러니까 서로 약간 어긋나는 시선들에 대한 영화, 라는 뜻이겠네요. 그리고 ‘단 하나의 정면 숏도 없는 영화’ 그리고 이제 ‘4분의 3 공간’ 마주 보고 찍은 게 아니라 살짝 돌려서 찍은 이런 공간의 영화. 그리고 ‘닫히는 문들의 소리에 대한 영화’, ‘발자국에 대한 발소리에 대한 영화’ 그리고 ‘사물들의 소리에 대한 영화’, ‘물소리에 대한 영화’, ‘수줍은 시선에 대한 영화’ 그리고 ‘채 마무리하지 못한 시선에 대한 영화’, ‘유리 소리에 대한 영화’ 그리고 ‘우리 마음 한복판의 죽음에 대한 영화’ 그리고 ‘얼굴들 위로 떨어지는 빛에 대한 영화’ 그리고 ‘그 얼굴로 떨어지는 빛에 대한 영화’ 그리고 ‘어둠 속의 빛에 대한 영화’ 그리고 ‘이마의 피에 대한 영화’ 그리고 ‘채 마무리되지 못한 레코드에 대한 영화’ 그리고 ‘주름진 흰색 블라우스에 대한 영화’ 그리고 ‘푸른색에 대한 영화’ 그리고 — 이제 또 뭡니까 — ‘꺾었지만 채 집으로 가지고 가지 못한 꽃들에 대한 영화’, ‘차 경적 소리에 대한 영화’,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대한 영화’, ‘모터사이클 소리에 대한 영화’, ‘초록색에 대한 영화’,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대한 영화’ 그리고 ‘주고받는 손에 대한 영화’, ‘손에 대한 영화’ 그리고 ‘부르주아적 자존심에 대한 영화’, ‘자존심에 대한 영화’, ‘문에 떨어지는 빛에 대한 영화’, ‘문 뒤에 떨어지는 빛에 대한 영화’, ‘열리고 닫히는 문들에 대한 영화’, ‘부르주아적 질투에 대한 영화’, ‘질투에 대한 영화’ 그리고 ‘램프에 대한 영화’ 그리고 브라운brown 앤and 옐로yellow. ‘갈색과 노란색에 대한 영화’, ‘노란색에 대한 영화’ 그리고 ‘직접적이지 않은, 간접적인 시선에 대한 영화’, 다시, ‘시선에 대한 영화’ 그리고 ‘하나의 평화로운 시선에 대한 영화’(‘그게 갤러리에서였던가, 섀퍼?’) 그리고 ‘매우 부드럽게 열리는 문들에 대한 영화’ 그리고 ‘반쯤 열린 문들에 대한 영화’ 그리고 ‘유리문 뒤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에 대한 영화’, ‘바보의 희망에 대한 영화’, ‘희망에 대한 영화’ 그리고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열리지도 않는 창문에 대한 영화’, 그리고 ‘붉은색 카시트에 대한 영화’, ‘붉은색 쇼핑 윈도우에 대한 영화’ 그리고 ‘문 뒤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영화’, ‘녹색의 침대에 대한 영화’, ‘녹색 커튼에 대한 영화’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며 거울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에 대한 영화’ 그리고 ‘요청받을 때조차도 바라보지 않는 눈들에 대한 영화’, ‘금속의 소리에 대한 영화’, ‘잠에 대한 영화’, ‘두 개의 서로 어긋나는 삶들에 대한 영화’.

    그래서 이제 계속 어바웃(about), 어바웃에다가 굉장히 쉬운 영어 단어들을 섞어서 썼는데, 이 평 자체가 사실 생각해 보면 메카스적 영화 만들기의 방법론하고 되게 상응하기는 해요. 그래서 한번 읽어봤고요. 한편으로는 이걸 보여드린 건, 2개를 굳이 보여드리고 중간에 로버트 프랭크와 관련된 언급까지 했던 건, 말하자면 메카스라는 사람을 두고 뭔가 ‘어떤 네러티브 영화 혹은 주류 영화를 이렇게 반박하면서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이렇게 거칠게 말해버리면 이 사람이 실제 비평에서 수행했던 섬세함이 싹 죽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그것보다는 주류 영화든 아방가르드 영화든, 본인이 좋아할 때조차 영화가 되게 서브젝티브하게 되는 걸 되게 경계했던 사람이예요. 무비 저널의 맨 앞에 실려 있는 그 첫 번째 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리고 한편으로 여기에 실려 있는 글들은, 저는 ‘메카스의 영화가 영화 일기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기적이지는 않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오히려 메카스 같은 경우는 이 사람이 필름 다이어리라는 양식을 만들었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아요. 본인이 주장하더라도. 하지만 다이어리로서의 비평 양식을 창안했다는 데에는 확실히 동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메카스를 평론가로 접했고 여전히 평론가로서도 매력적인 데가 되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요즘의 정리된 것들이 많이 나오면서 메카스의 일기나 기록들이 이제 좀 더 읽히지만, 메카스의 비평들도 좀 잘 살펴보면 미국 영화 비평에 되게 중요한 어떤 걸 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이렇게 굳이 무비 저널에 있는 글들을 몇 개 골라서 좀 봤습니다.


    의문 4. 오늘날 누구나 카메라를 들게 된 시대에 걸맞은 예언적 인물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영화를 예시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말로 메카스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영화의 양식을 개척했는가… 그러니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요나스 메카스 회고전11을 몇 년 전에 했었잖아요. 그때 그걸 큐레이션 했던 외국 큐레이터가 쓴 글을 보면 “21세기는 메카스의 세계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이런 시대, 이런 세대를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 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견해에는 잘 동의가 안 돼요. 왜냐하면 일단 시와 관련해서는 메카스의 영화가 실제로는 다이어리라기보다 시적 자서전에 가깝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랬을 때 시와 관련해서 메카스의 시가 어떤 의미인지는 오늘 어느 정도 말씀드렸다고 생각을 해요. 방금 봤던 글도 그렇고요. 그런데 말하자면, 메카스가 운용하는 거는 그냥 되게 사전적인 단어들이에요. 여기 보면. 그러니까, 누구나 네이버 사전을 참고할 수 있지만 그게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메카스처럼 만들 수 있다’라고 할 때 그 시적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공동의 언어를,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고 다른 방식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고, 자서전과 관련된 부분이 있는데 시적 자서전이.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아까도 얘기드렸지만 메카스는 자기 자신을 갈아넣으면서 여타 아방가르드 감독들이 문화적인 위치에 있도록 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메카스 감독을, 영화 감독이나 비평가이기 이전에, 어쩌면, 이분을 중요하게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예술가로서의 기획자’라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예술가인데 기획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사람이 기획으로 활동했던 그걸 통틀어서 하나의 예술로 인정해 주는 게 좋다… 그런데 사실은 보통 이건 여전히 잘 인정되지 않는 부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행사를 꾸리고, 누군가를 초청하고, 그 초청한 사람의 말을 누군가가 들을 수 있게 홍보하고, 그와 연계된 글들이나 인터뷰를 모아서 출판하고… 이런 일을 위해서 자금을 모으고 펀딩을 하는 건 정말로 사람을 갈아넣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근데 그런 것들에 대해 하나의 이런 흔히 영화 만들기나 비평(에 관한 통념)… 그러니까 영화 만들기 1순위, 비평 2순위, 기획은 3순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하고요. 그거를 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메카스인데,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기획자로서의 어떤 예술가라고 하는 것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도 이런 식의 기획을 하고 행사를 꾸리는 분들하고 일을 해봤고 저도 일해본 적은 있지만, — 지금은 아니에요. — 이제 이 얘기를 하면서 끝내면 될 것 같은데 마침 서울아트시네마가 여기로 옮겨서 다음 주부터 개관 20주년 영화제를 합니다. 20주년 동안 이런 걸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건 보통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이런 예술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예술에는 되게 감사를 표할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게, 메카스가 살면서 보여준 거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메카스의 영화는 이런 자기 자신을 갈아넣는 와중에, 그러나 영화 속에는 그걸 내색하지 않으면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영화에는 갈아놓은 흔적이 있는 게 아니라 갈아넣었기 때문에 결핍된 부분 때문에 우리가 짐작을 하는 것일 뿐이죠. 그리고 제가 볼 때, 그런 게 없는 영상은 메카스적이지 않아요. 그러면 메카스 영화를 실제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집행하는 건 바로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이제 우리는 메카스처럼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영화를 찍어 올리고 공유하고 남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저주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영화가 미학적,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으로 정당화되려면 그건 무슨 뜻이냐면 ‘우리 다 함께 삶을 갈아넣으면서 영화적 삶을 삽시다’가 됩니다. 그리고 그게 지탱되지 않는 그냥 일상을 기록해서 올리는 영상은 일상을 올리는 영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메카스의 영화는 내적인 시적 힘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말씀드린 이 자서전이라고 했는데 이 자서전 쪽에는 자신의 갈아놓음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걸 통해서 지탱되는 자서전이에요. 그러면 이거를 통해서 집행되는, 메카스식 표현으로는 일기책, 저는 시적 자서전을 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메카스적 영화라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메카스를 두고 단지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의 모델’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아주 단호히 반대하고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이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어땠는가’를 한번 영화 밖으로 나가서 생각해 보자, 라는 걸로 이제 얘기를 드리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는데 끝까지 남아서 들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내일까지 상영이 있으니까 — 또 내일 굉장히 긴 영화가 있죠. — 그래서 끝까지 자리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1. 유운성은 이 시네토크를 하기 하루 전에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위트 스틸먼의 《바르셀로나》 상영 후 “위트 스틸먼과 근과거의 시대극”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바 있다

    2. 이 날과 마찬가지로 5월 4일 수요일 19시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 상영 직후, 핍 초도로프, 세바스찬 메카스, 율리우스 지즈의 참석으로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https://www.cinematheque.seoul.kr/bbs/board.php?bo_table=program&wr_id=985

    3. 리투아니아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기획자. 1990년에 요나스 메카스와 인연을 맺었으며, 1992년부터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vie에서 프로그램 기획자와 코디네이터로 일한 적이 있다. 요나스 메카스를 다룬 초상화로써 《Meanwhile, a Butterfly Flies》(2002)라는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요나스 메카스의 글들을 집성한 3개의 볼륨의 책 『Poetry, Prose, Scripts and a Play』를 준비 중이다.
    출처: https://eulitfest.jp/year2022/en/day6/entry-174.html

    4. 프랑스 파리의 실험/독립영화 배급 회사 ‘RE:VOIR’(르:부아르)의 대표로, 요나스 메카스의 많은 필모그래피를 배급 중이며 최근에는 요나스 메카스의 주요 장편들을 포함하여 여러 장단편 작품들을 복원/디지털화 하여 8개 볼륨으로 블루레이/DVD ‘JONAS MEKAS : DIARIES, NOTES & SKETCHES’를 발매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2017.11.08. - 2018.03.04.)와 《요나스 메카스 회고전》(2017.11.22. - 2018.02.25.)의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고, 2018년 제35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맡아 ‘프리즘’ 섹션에서 마야 데렌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프로그램(‘마야 데렌 회고전’, ‘마야 데렌의 영향: 여성감독의 영화들’, ‘여성감독의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5. 위 내용은 2003년에 진행한 인터뷰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Jonas Mekas – My friendship with Yuri Zakova prompts accusations of spying (102/135)”,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a4t3RwI9uw

    6. 유운성이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던 시기에 2005년 제6회 영화제의 ‘영화보다 낯선’ 섹션에서 피터 쿠벨카의 작품들이 상영된 바 있다. https://archive.jeonjufest.kr/db/movieList.asp?sectionList=%23140%23&EP_NUM=6&sType=&sText=%ED%94%BC%ED%84%B0+%EC%BF%A0%EB%B2%A8%EC%B9%B4

    7. 피터 콘레슈너Peter Konlechner와 함께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필름 뮤지엄을 설립하였다. 이 둘은 2001년까지 이곳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홈페이지: https://www.filmmuseum.at/en

    8. 이에 대하여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는 필름 컬처Film Culture를 P. 애덤스 시트니가 편집하여 출판한 필름 컬처 리더인데, 다음 링크의 292쪽 “Interview With Peter Kubelka”(Jonas Mekas)를 참고하면 된다. https://monoskop.org/images/e/e0/Sitney_Adams_P_ed_Film_Culture_Reader_2nd_ed_2000.pdf

    9.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인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Alexandre Astruc)의 표현

    10. 『보스토크』 19호에 《풀 마이 데이지》에 대해 쓴 하나의 글은 유운성의 블로그 게시글을 통해 볼 수 있다.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20/12/blog-post.html

    1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6전시실과 필름앤비디오 상영관에서 각각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2017.11.08. - 2018.03.04.)와 《요나스 메카스 회고전》(2017.11.22. - 2018.02.25.)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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